나의 아저씨 / 박동훈 / 가장 외로워서 더 강해야 했던 남자

나의 아저씨 / 박동훈 / 가장 외로워서 더 강해야 했던 남자

나의 아저씨 - 박동훈

1부 – 하루의 시작, 침묵의 남자

 

아침이 온다.  
눈을 뜨기도 전에 머릿속에 하루가 그려진다.  
지하철의 냄새, 회사의 형광등,  
묵직한 회의실의 공기,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  
"당신은 오늘도 괜찮으신가요?"

박동훈은 그 질문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내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아들은 눈을 피한다.  
어머니는 걱정을 말 대신 눈빛으로 내보낸다.  
그래도 그는 일어난다.  
말없이 이불을 개고, 화장실 문을 조용히 닫는다.  
물소리 하나에도 조심스럽게,  
세상의 소음을 감당하기 전에  
자신의 존재부터 작게 만든다.

그의 아침 식사는 거의 매일 같다.  
식탁에 놓인 밥과 국.  
하지만 그걸 음미할 겨를은 없다.  
시간은 그를 기다리지 않으니까.  
그는 늘 기다려주는 사람이었지만,  
그를 기다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지하철 안에서 그는 창밖을 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터널 속,  
그 속을 뚫고 가는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그는 늘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고,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침묵으로 견뎌내는 방식으로.

회사에 도착하면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돌아오는 인사는  
늘 건조하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이 조직에서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더 조용해졌다.  
조용함은 방패가 되었고,  
무심함은 자기를 지키는 유일한 방식이 되었다.  
책임을 져야 할 일엔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고,  
공은 항상 다른 사람의 몫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버팀목'이라 생각했다.  
무너지지 않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누군가 기대면 버텨줘야 하고,  
지탱해줘야 하고,  
무너져도 소리 내선 안 된다.  
그래야 집도, 회사도, 삶도 유지된다.  
그렇게 그는 하루를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그는 혼자다.  
후배들이 함께 가지 않겠냐고 말한 적은,  
아주 오래전에 끊겼다.  
그는 먼저 다가가지 않았고,  
그들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건물 뒤편 식당으로 향한다.  
된장찌개 하나 시켜놓고,  
뜨거운 국물을 천천히 마신다.

누군가는 박동훈을 무뚝뚝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말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말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하루는 그렇게,  
말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단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2부 – 가족: 말하지 못한 상처

집은 안식처가 아니었다.  
박동훈에게 집은,  
말을 더 조심해야 하는 곳이었고,  
더 작은 목소리로 숨 쉬어야 하는 공간이었다.

아내는 그를 보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그의 존재는 투명한 유리처럼 지나갔다.  
한때는 웃으며 건네던 그릇과 수저가  
이제는 메마른 손끝으로  
탁자 위에 던져지듯 놓였다.

그는 아내의 변화를 알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녀가 늦게 들어오고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으며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묻지 않았다.  
왜냐면,  
알아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탓했다.  
‘내가 더 따뜻했더라면.’  
‘내가 더 말 걸어줬더라면.’  
‘내가 더 잘했더라면.’

그런 후회는 매일 밤  
식탁 위, 조용한 거실,  
아들의 방 앞에서  
속으로만 되뇌어졌다.

아들은 그를 어려워했다.  
그는 아들과의 대화를 시도했지만  
항상 몇 마디 안에 막혔다.  
"학교는 어떠냐?"  
"그냥요."  
"밥은 먹었냐?"  
"네."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대화.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

박동훈은 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문 너머의 침묵이  
자신의 것과 너무 닮아 있어서  
왠지 슬펐다.

형과 동생은 그에게 기대고 있었다.  
형은 어릴 적부터  
결정하지 못했고  
책임을 회피했다.  
그는 늘 형 대신 어른이었다.

동생은 꿈을 좇다가  
여러 번 넘어졌다.  
그때마다 돈이 필요했고  
그때마다 박동훈이 내밀었다.  
말없이,  
조건 없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어머니는 늘 미안하다고 했다.  
"동훈아, 네가 늘 고생이 많다."  
하지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덜 아프게 느끼길 바라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비웠다.  
감정을, 시간을, 체력을.  
그렇게 해도  
누구 하나  
그의 속마음을 묻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받기보단  
주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점점 더  
그는 ‘나’라는 사람의 감정을  
잊어갔다.

어느 날 거울 앞에 섰다.  
눈 밑이 푹 꺼져 있었고  
입술은 말라 있었다.  
그는 자신을 오랜만에 제대로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나는 지금,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구나.’

그의 가족은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힘든지,  
그가 얼마나 참는지,  
그가 얼마나 아픈지.

하지만 박동훈은  
그런 가족도 지켰다.  
왜냐면,  
그게 자신이 사랑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3부 – 회사: 책임이라는 이름의 감옥

회사.  
그곳은 전쟁터가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사’가 되어갔다.

누구보다 먼저 출근했고,  
누구보다 늦게 퇴근했다.  
실수는 감쌌고,  
결과는 팀원에게 양보했다.  
그는 칭찬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팀이 망가지지 않기를 바랐고,  
조직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회사는 그런 그의 마음을  
한 번도 알아주지 않았다.

상사는 그를 ‘무난한 사람’이라 불렀고,  
동료는 그를 ‘불편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후배는 그를 ‘잔소리꾼’으로 여겼다.  
그는 설명하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 싶지 않았다.

회의실에서 그는 늘 조용했다.  
말을 아껴야 실수가 없다.  
동의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신념은 종종  
현실 앞에서 침묵으로 굴복당했다.

그래도 그는,  
한 번도 책임을 회피한 적 없었다.  
문제가 터지면  
그는 가장 먼저 보고서를 썼고,  
고개를 숙였고,  
팀원들의 실수를 자신의 실수로 감쌌다.

누군가는 말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다.  
‘누군가는 이렇게라도 버텨야 하니까.’

후배 하나가 그를 배신했다.  
자신이 지시한 일이라며  
책임을 떠넘겼고,  
상사는 그것을 믿었다.

그는 억울하지 않았다.  
그럴 틈이 없었다.  
그는 또 보고서를 썼다.  
팀의 손실을 줄이는 방향으로,  
자신이 그 지시를 했다는 식으로.

그는 시스템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공격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전체’가 무너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런 그에게 회사는  
진급을 주지 않았다.  
성과 평가에서 그는 늘 ‘무난’했고,  
‘존재감 부족’이란 말이  
평가서에 반복되었다.

그는 웃었다.  
스스로에게.  
"나는 진짜, 참 재미없게 살았구나."

점심시간,  
사람들은 그를 피해 모였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혼자 식당을 찾았다.  
된장찌개와 콩나물국.  
한 끼를 때우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삼키는 식사였다.

복도에서 마주친 동료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형, 요즘 좀 피곤해 보여요."  
그는 웃었다.  
"괜찮아."  
그 말은,  
그가 회사에서 가장 자주 하는 말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오래 참았을 뿐이었다.  
회사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지우고,  
침묵을 버릇처럼 삼키며  
살아온 시간들이  
이제는 그를 사람 아닌  
하나의 기능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는 점점 말이 줄었고,  
눈빛도 흐려졌다.  
책임이 쌓일수록,  
그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출근했다.  
회사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다만, 팀원들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고,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게 박동훈이었다.

 

4부 – 이지안: 말없이 건넨 사랑

처음 그녀를 봤을 땐,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눈빛은 비어 있었고,  
걸음은 무겁고 조심스러웠으며,  
말투는 건조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침묵이  
그에게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표현하지 못하고,  
묻지 못하고,  
단단한 껍질 속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

처음부터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부서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고,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기를 바랐고,  
조금이라도 덜 외로웠으면 했다.

그는 물어보지 않았다.  
"왜 그렇게 혼자 있어요?"  
"가정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힘든가요?"

그는 대신 국밥을 사줬다.  
입술이 바싹 말라 있던 그녀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넸다.  
말하지 않고도  
전해지는 따뜻함이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엔 경계했다.  
그의 친절이  
계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믿었기에.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느꼈다.  
이 남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보여준 건  
말이 아니라 ‘존재’였다.  
무너지려는 순간에  
가만히 옆에 앉아 있는 사람.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등 뒤에서 버텨주는 사람.

그녀는  
그런 존재를 처음 만났다.

"왜 그러세요?"  
그녀가 처음으로 그에게 건넨 질문이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빛이 말했다.  
"나는 너 편이야."  
"너 혼자 아니야."  
"나는 여기 있어."

그녀는 그걸 믿었다.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녀가 울던 날,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녀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걸 잊지 않았다.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의 절망을 같이 견뎌준 사람.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냥 하루하루  
그녀 옆을 걸었다.

때로는 밤길을 같이 걸었고,  
때로는 지하철 플랫폼에서 함께 앉았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눈빛만 주고받았다.

그녀는 그를 통해 배웠다.  
사람은 꼭  
크게 안아야만 위로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  
때로는,  
그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시 믿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도  
그녀를 통해 배웠다.  
누군가를 지키려는 마음이  
자신을 지키는 힘이 된다는 것.

둘은 서로에게  
말이 없는 구원이었고,  
표현 없는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었다.

 

5부 – 무너지지 않은 남자, 울지 않은 사랑

 

그는 울지 않았다.  
한 번도.

상처받은 날에도,  
배신당한 날에도,  
아내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던 날에도,  
그는 울지 않았다.

눈물은 그에게  
사치였고,  
시간이었고,  
허락되지 않은 약함이었다.

그는 버텼다.  
무너지기 직전까지.  
하지만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커피를 내릴 줄 알았고,  
국밥을 맛있게 먹었고,  
기계를 잘 다뤘고,  
아이들에게 혼내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그는 그렇게  
‘생활’ 속에서 감정을 숨겼다.

가끔은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  
출근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두고,  
혼자 먼 바다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가지 않았다.  
그가 사라지면  
누군가의 삶이 흔들릴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않았다.

그는 사랑받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만두지 않았다.

그는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실수를  
감싸는 일은 계속했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자신이 얼마나 참는지,  
자신이 얼마나 버티고 있는지.

하지만 그는  
매일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그런 그를  
이지안은 알아봤다.  
세상 모두가 무시하고 지나친 그 남자를,  
가장 조용한 울음을 가진 그 사람을.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덕분에 살았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그에게는 구원이었다.

그는 살아 있었다.  
누군가의 삶에 닿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지켰고,  
누군가의 어둠을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건  
그가 지금껏 해온 모든 고통을  
조용히 덮어주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그는 그렇게 살아간다.  
조용히, 묵묵히,  
누구도 모르게  
누군가를 지키는 방식으로.

박동훈.  
그는 가장 외로워서,  
가장 강해야 했던 남자였다.

 

by K-Team